김민교님이 연출하신 리미트 연극을 김민교님 출연날에 관람했어요. remeet. 다시 만나다는 제목 그대로 첫사랑 남여가 15년만에 호텔에서 만나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코믹하면서 약간은 섹시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였어요. 김민교님은 호텔의 직원이면서 배우지망생인 필상역을 맡았고 개그스러운 역할이에요. 남주는 영화감독인 봉필이, 여주는 국민 첫사랑 수지에요. 여주역을 맡으신 분이 하얗고 청순한 딱 첫사랑 느낌이여서 감정이입이 잘 되었어요. 봉필이가 제작한 '악마는 브라자만 입는다.', '혹성 탈춤'... 등의 영화 스토리의 뮤즈가 수지였대요. 영화 제목 웃겼어요. ㅋㅋ 연기 다들 잘 하시고, 스토리 완전 웃겨요. 5분마다 웃은 것 같아요. 15년 전에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남자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는 주제인데, 수지는 아들 둘에 남편은 사별했고, 지금 감정이 그 정도는 아니라며, 또 성공을 위해 떠난 남자에게 원망이 남아있는 걸 보여주는데 결국은 친구로 남기로 해요. 남녀 사이의 일은 감정이 가장 크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수지라면 이렇게 할거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어떤 사정이 있건 만약 수지같은 상황이라면 다시 만나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고, 그 남자에 대한 감정과 믿음이,그러니까 함께 할 때 더 행복하고 서로 성장할 수 있느냐에 대한 확신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들 얼굴은 굉장히 잘 보이지만, 물건이 날아올 것 같고, 정말 실감나는 4DX 보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배우님들 침이 튀기시길래 마스크 착용을 할 수밖에 없었고요. ㅋㅋ
정문에 창문처럼 생긴 정사각형 브라운관에서 영상이 나오기도 하고 반투명해지면서 그 뒤의 배우들의 연기 실루엣이 보이기도 하고 브라운관이 열리면서 뒤쪽에 법원로고가 나오면서 재판장이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장소인 듯한 느낌을 실감나게 주어요. 조명 사용도 좋았고요.
그리고 황지희 여배우의 살인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용의자 이무길이 변호사 김요한에게 과거의 일을 진술하면서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연출되는데, 그런 사건의 퍼즐 조각을 맞추면서 누가 진짜 범인인지, 누가 돈을 가져갔는지 생각해 보면서 관람하는 재미가 컸어요.
실화를 재구성했다고 하는데 스토리 탄탄했고, 김요아가 당한 학교폭력의 복수가 사건의 발단이 되면서 진짜 나쁜 소녀라고 말할 수 있을 지 생각해 보게 해요.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어요.
보이가 요아의 남자 친구인데 힙합 소년이에요. 오늘의 캐스팅에서 가장 힙하진 않아 보이는 배우분이 출연하셔서 미스 캐스팅이이면 어쩌지 했는데, 아니었어요. 기대대로 랩을 열심히 연습하셨지만 못하셨고, 극 중에 힙합 무대를 하시는데, 호응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정적 속에서 고개 숙이고 웃고 있었어요. 무대를 마치신 후 정적 속에서 호응없는 힙합 무대 즐겨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는데, 너무 웃겼어요. ^^
요아는 진짜 나쁜 소녀일까는 질문만 남았네요. 요아는 학교 폭력을 당하고 살인자로 판결된 후 방탕한 삶을 살아요.
무심코 보면 영락없는 밤풍경이다. 깊은 밤인 듯 집과 주변의 나무는 세부 형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통 시커멓다. 집 앞 가로등이나 2층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환하고, 물에 비친 모습도 선명할 정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하늘은 화창한 한낮 풍경이다. 푸른 하늘에 솜사탕을 여기저기 던져놓은 듯 흰 구름이 넘실댄다. 집 앞의 울창한 나무도 하늘에 겹친 부분은 가지와 이파리 사이로 밝은 하늘이 드문드문 보인다.
화가가 이 그림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 • • • • • • • • •
낮과 밤의 모순을 연출한 것이다. 우리의 시각은 그림을 통해 배반당했지만, 사실은 그 배반을 통해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이고, 도무지 섞여서는 안 될 적대적 대조로 느껴지는 삶과 죽음도 사실은 모순 속에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살면서 동시에 죽는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인간의 감정도 모순 관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누구나 일생 동안 되풀이하여 겪는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을 보자. 통념적으로 사랑은 미움과 반대편을 향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가슴 벅찬 사랑의 순간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설렘과 환희로 가득하다. 하지만 질투라도 생기면 세상에 그보다 더한 고통이 없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경험적으로 안다. 질투, 섭섭함을 비롯하여 미움과 연관된 감정이 사랑과 뒤죽박죽 얼버무려져 진행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산모를 쓴 양복 차림의 수없이 많은 남자가 도시의 하늘을 채우고 있다. 위와 아래, 좌와 우로 캔버스 경계 때문에 사람과 건물의 일부가 잘린 모습이어서 동일한 장면의 무한한 확대를 암시한다.
(1) 왜 중산모를 쓴 남자인가? 이 모자의 의미를 화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산모를 쓴 남자는 익명의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중산모를 착용한다. 내 자신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모습의 수많은 사람을 등장시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나같이 동일한 복장, 특히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장 차림이다.
(2) 그림에서 또 하나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 있다. 어느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뒤로 보이는 건물의 창문과 커튼도 하나같이 모두 굳게 닫힌 상태다.
(3) 왜 그림 속 인물들은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에서 부유할까? 마그리트는 "나는 당신이 예상하지 못할 곳에 남자를 배치했다. 남자는 하늘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골콘다라는 그림 제목과도 연관성이 깊다. 화가는 이 그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골콘다는 인도의 부유한 도시, 마법 같은 도시"라는 말을 덧붙였다.
화가가 이 그림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 • • • • • • • • •
(1) 현대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개성과 자율성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렵다. 동일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따라 질주하는 군중의 한 부분이다.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여는 출발점에 서있어야 할 초등, 중등고등학생이 오직 시험성적과 대학입시라는 획일적인 목표와 경쟁과정에서 십여 년을 보내야 한다. 성인이라고 해봐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승진 사다리를 오르거나 정년 때까지 큰 변동 없이 직장에서 자리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일상에서의 목표도 대동소이하다. 대도시에 자기 소유의 집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숙제다. 다양한 주체는 사라지고 사회가 강제하는 경쟁논리를 속속들이 내면화한 군중이 대신한다.
(2) 현대인은 항상 군중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역설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경쟁 원리, 효율성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경쟁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 넣는다. 경쟁자 사이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마음을 기대하기 어렵다. 솔직한 시선 교환은 사라지고 시선이 엇갈리는 경계의 곁눈질이 남는다.
(3)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과 신분상승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 신분상승은 빈곤한 상태에 빠진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불행이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서 생긴 당연한 결과이며, 온순하게 자책하고 앉아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필요한 이데올로기다. 만약 정상적인 사디리 오르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면 편법, 극단적인 경우에는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루려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하다못해 복권이라도 매주 사서 허황된 일확천금의 꿈이라도 마음에 품고 위안을 삼는다. 현실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땅에 붙어있지만, 정신은 도시의 공중 위에서 정처를 찾지 못하고 떠다닌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옛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한 남자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거울을 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뒷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옆의 책이 반사된 모습을 봐도 거울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사람과 달리 책은 글씨가 거울에 거꾸로 보여서 제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하는 중이다. 자세히 보면 작가와 책의 제목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그려놓았다.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고든 핌의 모험>이다. 이 소설은 상투적인 모험소설과 달리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오는 충격과 공포가 가득하다. 생존의 한계 상황에서 발생한 살인과 인육을 먹는 행위에서 어떠한 상황이라도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라는 견해와 단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견해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디까지 그 행위가 인정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는 고민을 촉발한다. 화가가 이 그림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 • • • • • • • • • 거울로 뒷모습을 보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금지된' 재현이라면, 일상적으로 정신을 통해 접하는 현실적 재현은 사실의 일부만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나 사물은 단 한 순간도 앞모습과 뒷모습이 분리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그토록 확실하다고 믿는 눈이 고작 사실의 일부만 알려주니 당연히 정신은 늘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것을 도대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그동안 확실하다고 자신해 왔던 수많은 지식이 근본적으로 의심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미국에서 광산 회사와 노동자 사이에 있었던 실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작품이 작품상을 탔는데, 이 뮤지컬은 한국에서 창작했어요. 2021년에 첫 선을 보이고 이번에 연출을 약간 바꿔서 새로 개막했고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 다큐멘터리는 작품상을 받았을 것 같았어요.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 폐지 이후 100년이 지났는데 남부 지역은 흑인 노예가 있었고, 흑인에 대한 차별과 노조 운동이라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주제가 무거운 탓도 있겠지만 크게 재미는 없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은 건 대사 중에 명언이 있었어요. [광부들은 갱도에 들어갈 땐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나올 때는 똑같이 검게 변하지. 그래서 세상을 차별 없이 볼 수 있다] 백인도 광산에서 나올 땐 흑인처럼 까맣게 되는 이미지를 차별로 연결시킨 대사가 멋졌어요. 그 외 음악, 무대 연출, 배우들의 연기 모두 무난한 정도이고 특별히 인상 깊은 강점은 없었어요. 시나리오도 평범해서 재미도 감동도 so so했고요. 뭔가 긴박감이 없어서 다큐멘터리 보는 느낌일 수 있어요. 우와! 할 정도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참 남다른 재능이 필요한 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