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기억들을 지우고 싶다
말없이 지나치는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 나름대로의 책임이 있기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꾸 멀어져 가는 날들이
어느덧 뒷전으로 물러나더니
어저께 시작한 것 같은 일이 벌써 종점에 다다르니

또 한 장의 수만큼
그렇게 사각지대를 벗어나야 하는 오늘
거둔 만큼만 가지고
문을 닫는다

365일의 사연들이 숨죽이고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거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 대고 속삭이던 말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호수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 수 밖에

금잔디 ㅡ 김소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담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갈대의 문장 (정태종)

바람에 얽맴 없이 초연히 흔들리다
꺾일 듯 쓰러질 듯 일어설 듯 눕더니
슬며시 바람을 안고 꼿꼿이 일어선다

바람을 품은 백필 눈부신 초가리
가는 필관 꼿꼿하게 때때로 비스듬히
허공에 휘갈긴 문장 가을은 표음문자

초서로 뒤엉켜도 해서로 풀어내고
일시에 밀려나도 다 같이 일어서니
휘리릭 써 내려가는 올가을 첫 페이지

요즘 나의 픽은  

팽이(김미정)

누가
후려쳐 주지 않으면
죽은 목숨인 겨

죽을 듯
돌고 돌아야
살아 있는 것이여

까무러치듯 되살며
곧은 속심 팽팽 세울 때
정수리에 피어나는 꽃 무지개

그게 살아 있는 빛깔인 겨
그답게 아름답게
숨쉬는 게여

보기만 해도 찬란한 그대
젊음의 청춘

세상을 씩씩하게 만들 사명으로
하루를 엮어가는 너 청춘

피어나는 꽃처럼
눈부신 햇볕처럼
어디에나 빛나는 청춘아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장엄한 숨소리가 쿵쿵대는
청춘의 심장 고동소리

흐르는 땀 소리
숨죽여도 다 들리는 내일의 소리
티셔츠 운동화도 거추장스런 너 청춘

너야말로
꽃보다 아름답다
쉬지 않고 설레는 청춘아!

실수조차도 아름다운
너 청춘아!




<요즘은 요렇게 사물 묘사하면서 인생을 은유한 시가 좋아>

누가
후려쳐 주지 않으면
죽은 목숨인 겨

죽을 듯
돌고 돌아야
살아 있는 것이여

까무러치듯 되살며
곧은 속심 팽팽 세울 때
정수리에 피어나는 꽃 무지개

그게 살아 있는 빛깔인 겨
그답게 아름답게
숨쉬는 게여

"이분 자연물로 시의 발상이 좋아. 그런데 이번 시는 좀 더 다듬어야 할 것 같은데."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갈꽃 한 다발 손에 든 노인
휘적휘적 길을 걷는다
일렁이는 갈꽃 향기
저녁 햇살에 한 줌씩 날린다

노인과 갈꽃, 갈꽃과 노인
외롭고 쓸쓸한 마음 닿았던가
한몸이 되어
우줄우줄 수런거리며 툭툭 치며 킥킥거리며
그림자 길게 또는 짧게
춤추고 노래하고 맴돌고

저녁 노을이 지는 길 위에 그윽이
두 가을이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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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을 기다리는 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같아서
함께 꿈꾸고 있다

2월인데도 새들이
빈 가지 끝 봄을 보았나
날갯짓에 신바람 났다

나도 저 날갯짓 따라
덩실거리며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펼친다

한세상 살아가는 일
별것 아니란다

마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면 되는 거야

보이지 않는 마음 하나
곱게 물들여 가면 되는 거야.  

비바람 맞고
찬이슬에 젖으면서도

작고 힘없는 나도
굳세게 걸어온 이 길인데

하물며 사람인 네가
생을 겁낼 필요가 어디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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