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 그 아래

작은 의자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치고 곤하여 의기소침해 있는 날

내가 당신에게 편한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아무런 부담 없이 왔다가

당신이 자그마한 여유라도 안고 갈 수 있도록

더 없는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분노의 감정을 안고 와서

누군가를 실컷 원망하고 있다면

내가 당신의 그 원망을 다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분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간혹 당신이 기쁨에 들떠 환한 웃음으로 찾아와서

그토록 세상을 다 가져 버린 듯 이야기한다면

내가 당신의 그 즐거움을 다 담아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내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억수로 쏟아져

당신이 나를 찾아 주지 못할 땐

내가 먼발치서 당신을 그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무슨 이유로 당신이 한동안 나를 찾아오지 못할 땐

내가 애타게 당신을 걱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한참 뒤에나 내게 나타나게 되거든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내게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희미해져

당신이 영엉 나를 찾아 주지 않는다 해도

정녕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당신이 내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그랬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고

 

가끔은 이성과 냉정 사이

미숙한 감정이 터질 것 같아

가슴 조일 때도 있고

감추어둔 감성이 하찮은 갈등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가쁜 숨을 쉬기도 한다

 

누가 그랬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그저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안아주는 거다"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리는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잊어버리세요, 꽃을 잊듯이

잊어버리세요, 한때 세차게 타오르던 불꽃을 잊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어버리세요.

 

시간은 친절한 벗

우리는 시간과 함께 늙어 갈 거예요.

만일 누군가 묻거든 대답하세요.

그건 벌써 오래전 일이라고

꽃처럼 불처럼 아주 먼 옛날

눈 속으로 사라진 발자국처럼 잊었노라고.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 번쯤 온 길을 뒤

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아래 까마득한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 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르르면 먼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 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서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지겠고

 

무겁고 깨질 것 같은 그 독을 들고 아등바등 사랑했으니

산 죄 크다

 

내 독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물 엎질러 착한 사람들 발등 적신 죄

더 크다

내 노래는 다정한 사람의 팔처럼

당신의 주위를 감싸리라

축복의 입맞춤으로 

당신의 입가에 가닿고

당신이 혼자일 때 곁에 앉아 속삭이고 

군중 속에 있을 때는 울타리가 되리라

 

내 노래는 꿈속에 한쌍의 날개가 되어

당신을 미지의 땅으로 데려가리라

어두운 밤이 당신을 뒤덮으면

머리 위 성실한 별이 되어주리라

 

내 노래는 당신의 눈동자에 젖어들어

만물의 마음속으로

당신의 시선을 인도하리라

그리고 죽어서 내 목소리가 침묵할 때

 

내 노래는 살아있는

당신의 가슴속에서 이야기하리라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들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꼭 새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랍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영혼이 깃들듯이

이들처럼 저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욱 아름다워지게 하소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날의 첫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이 충고는 자네를 위한 것이야.

만약 자네가 권총에 손을 뻗어

얼굴을 내밀고 방아쇠를 당기면

내 가만두지 않겠네.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이는 많다던

교수의 훈계를 

다시 복습할까?

 

세상이 재미없다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있다고?

이봐, 뻔한 소리를 되풀이할 거야?

자네 시체가 관 속에 있어도 후려갈길 거야.

 

주변에서 일어나는 잡스런 일이야 아무래도 좋아.

비 맞은 중처럼 불평하는 건 이제 집어치워.

세상이 그렇고 그렇다는 것은 

어린애도 다 알아.

 

자네 꿈은 

인류를 개선한다는 것이 아니었나?

아침이면 자네는 그 꿈을 비웃을 거야.

그러나 인간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어.

 

그래, 나쁘고 형편없는 자들이

버글버글하고 강자인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개처럼 죽을 수야 없지.

최소한 오래 살아 놈들 약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어?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 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 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 놓고

구름처럼 하옇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게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 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 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뾰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져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날마다 하루는

반가운 초대

아침이 밝아 오면

새로운 삶이 당신을 기다린다.

눈부시고 다채로운 삶이.

낡은 하루가 가고

새 하루가 찾아왔다.

오늘 하루가 어떤 하루일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가슴 짓누르는 부담으로

혹은 설레는 약속처럼 느낄 수도 있다.

나를 위한 날이 밝았다며 기뻐할 수도 있고

씻지도 않은 채 기운 없이 무덤덤할 수도 있다.

오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본다.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이미 지나간 세월이라 나에게는 안타깝지만

그대는 지금 시작하면 되니 무엇이 걱정이오.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루는 그날까지

너무 꾸물대지도 말고 너무 서둘지도 말게.

 

 

이 생의

여러 일에 쏠리는 마음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해야 할 일을

아주 단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파도에 따라

어느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우울해졌다 하고,

어떤 일에 이득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가

꼭 갖고 싶었던 무엇을 얻지 못하면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처럼 속상해하는

본능적인 마음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 생의 일들에 덜 몰두한다는 것은

삶에서 높은 파도를 만나더라도

넓고 깊은

고요한 마음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눈이 보인다

귀가 들린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 

인생은 아름다워

해가 기울고 하루가 저물면 가만히 앉아

오늘 그대가 한 일들을 떠올려 보라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 줄 따뜻한 말 한마디

세심한 배려의 행동

햇살 같은 친절한 눈빛이 있었는지를

그랬다면 그대는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하루가 다 지나도록 

누구에게도 작은 기쁨을 주지 않았다면

온종일 그 긴 시간에도

누군가의 얼굴에 햇살을 비춘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친 영혼을 달래 준 아주 사소한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날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더 나쁜 날이었다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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