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짖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검푸른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하느라 쑤시고

갈라진 손으로 불을 피웠다.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잠이 깬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면서 아버지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집에 잠복한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일어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냉담한 말을 던지곤 했다.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직무에 대해.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

건너편 풀이 더 푸른 이유가 

그곳에 늘 비가 오기 때문이라면,

 

언제나 나눠 주는 사람이 

사실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면,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고

 

당신이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

사실은 두려움으로 마비된 사람이라면,

 

세상은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함께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자신은 진정한 안식처가 없으면서도 

당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어쩌면 그들의 풀이 더 푸르러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그 색으로 칠했기 때문이라면.

 

다만 기억하라, 건너편에서는

당신의 풀이 더 푸르러 보인다는 것을.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

내리는 비에는 

옷이 젖지만

 

쏟아지는 그리움에는

마음이 젖는군요.

 

벗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벽은 안과 밖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들은 안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면들을 함께 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입니다.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할게 되리라는 걸.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

자신의 일부를 억압하거나

다른 이가 당신을 비하하는 것을 그냥 놔두는 것은

창조주가 당신에게 건네준

당신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만일 겨울이 없다면

산뜻한 봄날의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역경의 겨울을 치른 자가

번영의 새봄을 즐기게 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우리가 신호등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곧 바뀔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곧 바뀔거야.

좋게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때 알았더라면,

그 때 잘 했더라면,

 

훗 날엔 지금이

바로 그 때가 되는데

지금은 아무렇게나 보내면서

자꾸 그 때만을 찾는다. 

잘했다, 고맙다, 예쁘구나,

아릅답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싶다, 믿는다, 기대한다,

반갑구나, 건강해라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말은

의외로 소박하다. 

첫눈은 첫눈이라 연습 삼아 쬐금 온다.

낙엽도 다 지기 전에 연습 삼아 쬐끔 온다.

머잖아 함박눈이다 알리면서 쬐끔 온다.

 

벌레 알 잠들어라 씨앗도 잠들어라

춥기 전 겨울옷도 김장도 준비해야지

그 소식 미리 알리려 첫눈은 서너 송이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위대한 일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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